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한 것이 1513년이다. 정치에 관련된 그 어느 책이 이 소책자 만큼 오랫동안 논란이 되고 또 영향을 미쳤을까.

그 중 책의 18장이 특히 그러하다. ‘군주가 약속을 지켜야만 하는 방법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단 이 장에서 저 유명한 ‘사자와 여우’의 비유가 등장한다. 마키아벨리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신화속 종족 켄다우로스족의 키론이 아킬레스를 비롯 수많은 영웅들을 키워냈음을 상기하면서, 군주 역시 두 가지 속성 곧 인간과 짐승의 속성 각각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짐승의 역할을 해야 할 때에는, 여우와 사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덫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여우가, 늑대를 쫓아 내기 위해서는 사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사자에게만 의존하는 자는 사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뒤이어 너무나 유명한 다음 구절이 나온다.

“그래서 현명한 군주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될 때 그리고 약속을 하게 된 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는 약속을 지킬 수 없고 또 지켜서도 안됩니다. ... 군주들의 신뢰없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조약과 약속들이 무효가 되고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는지 수없이 많은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우의 역할을 가장 잘 아는 자가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4.13 야4당 정책연합 합의, 4. 27 야당 압승, 4. 28 한EU 비준동의안 상임위 통과, 5. 2 여야정 합의, 5. 4 비준동의안 본회의 통과, 이렇게 이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나는 마키아벨리의 경구를 떠올리게 되었다. 마침 이번 학기 강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정당 혹은 정치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어디까지나 사인들간의 계약관계가 아니라, 말하자면 ‘정치적’ 모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둘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군주가 ‘모든’ 약속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2가지 경우를 제시한다. 첫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될 때’이다. 둘째는 이른바 ‘사정변경의 원칙’이다. 이는 국제조약에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원리로도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민주당이 4.13 정책연합 합의에 포함된 곧 “전면적 검증” 없는 ‘한EU FTA 비준저지라는 약속을 파기할 어떤 사정변경이 있었는가. 굳이 들자면 4.13합의이후 야당의 압승이라는 ’사정변경‘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이 합의를 할 시점과는 달리, 상임위 통과시점인 4월 28일에 민주당은 분당을과 강원도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터, 분명 사정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4군데의 재보선 결과일 뿐이다.

야권연대는 분명 4.27 재보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실익에 있어 재보선과는 비교가 안되는 2012년의 총선과 대선까지를 겨냥한 일종의 전략적인 포석이다. 해서 사정변경을 이유로 민주당이 정책합의라는 약속을 깨기에 아무리 봐도 그 근거가 많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첫 번째 곧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될 때’의 경우를 보자. 한EU 비준저지라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과연 민주당에게 손해가 된다고 볼 수 있을까. 비준저지 곧 야권연대를 통해 얻게 될 정치적 이익과 합의파기 곧 비준통과 다시 말해 한나라당과의 합의를 통해 생길 이익 중 후자가 더 크다면, 민주당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최소한 마키아벨리의 권고에 따른다면 말이다. 하지만 민주당에게 가장 큰 이익은 뭐니 뭐니해도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EU FTA 비준저지를 했을 때 곧 야권연대라는 약속을 지켰을 때, 민주당의 지지자들이 대거이탈해서 한나라당으로 넘어가서 2012년의 승리가능성을 현저히 위협할거라는 나름의 근거가 있을 때 민주당의 약속파기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에 압승을 가져다 준 유권자들이 민주당이 한EU 비준저지에 적극 나섰다고 해서 한나라당 지지로 돌아설 거라고 볼만한 그 어떤 징후도 발견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민주당에 손해가 될 것이라는 필요충분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역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민주당이 정책연대 합의를 깨고 한EU 

FTA 비준동의를 했을 경우,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대거 민주당으로 이동해서 2012년 정권창출의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질 경우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지난달 5일,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교섭단체연설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DB

물론 대부분 오독이지만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음모론의 원조로 치부된다. 그 중 위에서 인용한 구절이 그 전형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 악의적 의미에서의 ‘마키아벨리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민주당의 합의 파기는 설명되지도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이것이 설명되려면 항간에서 말하듯 한나라당과 민주당사이에 그 무슨 밀약이 정말 있었던가, 아니면 5.2 여야정 합의가 이 나라 중소상인이나 농민들에게 한EU FTA로 인한 피해를 보전하기에 충분하다고 진짜로 믿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 합의를 아무리 뜯어 봐도 이는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것도 아니라면 박지원 원내대표의 말처럼 야권연대 합의문을 ‘어제(5.2) 처음 봤다’는 말이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런 것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말이 안된다. 정권재창출을 목표로 하는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야4당의 당대표가 서명한 합의문을 읽어 본적도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시기(?)하다. 이것도 아니라면 박지원 원내대표의 말처럼 ‘국익차원’에서 합의해 줬을 경우다. 이 또한 ‘국익’이라는 그 자체 정의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을 야당 원내대표 혼자서 정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국익이라는 개념이 대개 집권당의 언어전략이라는 점에서 그 무슨 여야당 바꿔보기식의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전면적 검증’을 주장한 이유가 과연 한EU FTA가 국익이 도움이 될 건지를 알기 위함인데 야권연대 약속파기로 인해 아예 불가능해져버렸다.


버나드 쇼가 그랬다. “우왕좌왕하다가 내 이리 될 줄 알았다”. 그렇다. 적어도 내가 관찰하기게 한EU FTA 비준동의안은 막을 수가 있었다고 본다. 아니 최소한 이런 식의 통과는 막을 수 있었다고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거의 ‘신비주의’수준의 민주당의 대응전략으로 인해 상황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버렸다. 이를 통해 민주당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Posted by 이 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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